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문단 편집) ==== 1910년대 ~ 1920년대 ==== 1912년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있었을 때, 그는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이자 개혁가인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를 초청했다. 간디는 고칼레로부터 인도와 인도의 문제들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자서전》에서 고칼레를 '멘토'라고 부르며 그의 정신을 칭찬했다. 고칼레는 인도의 서구화를 지지하는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소모적인 참호전을 치르게 되면서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게 된 '''영국 정부가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한 인도 자치권 보장 약속'''을 믿고, 영국군 모병관으로 참전했다. 당시 보어 전쟁의 영웅으로 각광받은 간디를 본 수많은 젊은이들이 [[캐나다]]나 [[호주]]와 같은 자치권 보장을 믿고, 영국군에 지원했는데 그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1915년 고칼레의 요청으로 간디는 인도에 귀국했다. 1918년 11월, 종전 이후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자 간디는 모병관으로서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다시 한번 영국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수여받게 되었다. 이후 간디가 군 생활을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받은 정근 훈장까지 합하여 총 3개의 영국군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급할 수 없었으며, 영국에서도 인도인 신분으로 각종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자신 또한 영국에서 배척당하게 되자 결국 인도 정치계에 입문하여 본격적인 인도 독립운동을 이끌게 된다. 독립운동을 시작할 당시의 간디의 나이는 50세였다. 4개의 제국([[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고, 제국주의의 종말과 공산주의 정권의 탄생을 불러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 정부는 약간의 개혁만 하고 자치권 약속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영국의 배신 때문에 20년 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이 다시 한 번 자치론을 미끼로 협상을 하자 이를 단칼에 거절하고 반전운동을 전개했으며, 결국 식민지 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당하게 된다. 반영운동이 지속되자, 1919년 영국 식민지 당국은 <롤럿(Rowlwatt)법>을 통과시켰다. '''<롤럿법>'''은 영국 정부가 불복종 운동 참가자들을 범죄자로 체포하고, 사법적 검토나 재판없이 투옥할 수 있도록 한 반인권적인 법이었다. <롤럿법>이 통과된 후, 간디는 항의의 뜻으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했다. 영국군은 시위에 참가한 비무장 군중들에게 발포했다. 이로 인해 인도인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간디는 군중들에게 비폭력을 강조하며 영국인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말라고 했다. 간디는 1920년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취임했다. 1921년 9월 21일 마두라이에서 인도 빈민층과의 동질성을 상징하는 '''베옷'''을 채택했다. 지도자로서 인도 국민들의 영국 상품 불매 운동, 정부 및 기관 보이콧을 이끌었다. 그는 1922년 정부에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도 영국의 공장제 수공업에 대항해서 인도의 전통 수공업을 상징하는 물레인 '''차르카'''를 돌리면서 투쟁을 이어 나갔다. 후에 차르카는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24년 2월 간디는 맹장염 수술로 석방되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황에서 간디는 독립운동을 위해 무슬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19년 오스만 제국이 패망한 후,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를 겸한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칼리파]] 제도 폐지를 우려한 인도의 무슬림들은 칼리파 제도 지지를 서명하는 '''힐라파트 운동'''을 벌였다. 간디는 이 운동을 지지함으로써 무슬림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비롯한 힌두교 인사들은 이러한 결정을 반대했다. 간디의 힐라파트 운동 지지로 간디를 지지하는 무슬림이 늘어나면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력사태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1922년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부' [[아타튀르크]]가 칼리파 제도를 폐지하면서 힐라파트 운동은 실패했고, 간디를 지지했던 무슬림들도 다시 외면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